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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손의 패션공부

[서양복식1-6] 고양이손와 패션공부-중세 비잔틴 복식

by 고양이손83 2024. 2. 14.

중세는 지중해 문화권을 형성 하였던 로마 제국이 395년 동서로 분리된 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 까지를 말한다.

동로마 제국은 수도를 비잔티움에 정하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였다. 1000년간을 더 지속하여 아시아로부터 타민족의 공격을 막아 동유럽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는 한편 문화를 발전시켰다.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고 한다. 비잔틴 복식은 중세 유럽 복식의 모체가 되었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동서양의 접촉점으로, 상업, 군사상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지중해와 흑해를 맺는 요지이기도 하였으며 그 당시의 유럽, 아시아대륙의 중심이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처음에는 대중의 종교였다. 점차 사류계급의 종교가 되어 비잔틴 문화의 지침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권능 및 천국의 영화를 나타내기 위한 화려하고 장엄한 양식을 위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금욕주의에서 몸을 완전히 감싸고 드러나지 않는 실루엣과 문양, 색조 등을 사용하여 금욕적이고 권위 있는 형태를 이루었다. 종교적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의 권능과 영화를 현실적 감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상업활동은 국가재정의 주 원천이었다. 지중해, 흑해를 무대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금속이나 유리 제품, 직물공업의 제조 및 세공업 등이 매우 발달하였다. 비잔틴 제국을 번영하게 한 주요인이다. 초기에는 특히 비잔틴 복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견직물공업으로, 시리아와 페르시아로부터 견직물을 수입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비잔티움에 견직물공업을 확립시켰다. 비잔티움에서 생산된 견직물은 품질이 우수하며, 문양이 화려하여 비잔틴 제국의 생활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비잔틴 문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리적 조건과 경제적 번영에 힘입은 동방 문화의 교류이다. 페르시아의 화려한 색채감각과 중국의 견직물은 비잔틴에서 혼합, 발달하여 비잔틴의 조형 문화, 복식의 특징적 요소가 되었다. 장신구의 발달은 동방 양식에 의존한 바 컸고, 전체적으로 비잔틴 복식을 그리스, 서유럽이나 로마와 매우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스 예술이 외형의 균형이나 비례에 중점을 둔데 반해 비잔틴 제국의 예술은 종교적인 내적 감정의 표현을 위해 색채의 조화에 중점을 두었다. 비잔틴 예술은 4세기 이후 크리스트교 미술로서 급속히 발달하였다. 원천은 고대 그리스 및 동방에 두었다 동방적 성격은 비잔틴 예술에 신비적, 종교적 성격을 가지도록 하였다. 비잔틴 예술의 모티프는 신비성과 추상성, 동방적 장식성으로 표현되었다. 신위적인 장중함과 천상적인 순요함을 띠었다. 동방의 화려한 색채와 풍부한 장식성의 도입으로 종교적인 비잔틴 예술에 신비스러움을 띠게 하여 신의 영광을 나타내었는데, 복식에도 이와 간은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비잔틴 복식은 화려한 직물과 장식품을 사용하였는데, 남녀의 기본 의복은 달마티카, 튜닉, 팔루다멘툼이었다. 팔루다멘툼은 황제와 황후만이 입을 수 있었으며, 평민들은 팔라, 팔라움을 입었다. 남녀 모두 긴 소매의 튜닉을 입고 허리띠를 매었다. 말기부터 황제와 귀족들은 튜닉과 달마티카에 세그멘티나 클라비스를 대어 그들은 신분을 표시했다. 달마티카는 로마 말기인 1세기쯤 달마티아라는 지방에서 소수의 크리스트교들이 처음으로 입기 시작한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때 크리스트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왕족이나 교황, 사제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모두 크리스트교 신자가 됨에 따라 달마티카를 입게 되었다. 어깨부터 아랫단까지 그리고 소매 끝동에 붉은색이나 보라색의 클라비를 장식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수 나 클라비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을 입었다. 처음에는 거칠고 성글게 짠 울이나 리넨을 사용하다 크리스트교 공포 후에는 실크로 만든 화려한 의상으로 변화하였다. 클라비의 장식과 색이 다양해지고 옷맵시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소맷부리를 넓히고 진동과 가슴둘레는 좁혀 상체에 맞게 하였다. 이 후에 달마티카는 서유럽에 대표하는 비잔틴 의복으로 전래되어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 복식의 기본형이 되었다.

 비잔틴에서 튜닉은 더욱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기본인 T자형으로 소매는 길고 좁았으며, 길이는 무릎 아래에서부터 발목까지 다양하였고 허리는 끈으로 매었다. 양옆은 활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트임이 많았다. 옷감은 울이나 실크 또는 실과와 울의 교직 등이 사용되었고 중류계급 이하는 울을 주로 사용하였다. 상류층은 클라비와 세그멘티로 장식하였다. 튜닉이나 달마티카가 화려한 반면에 스톨라는 백색의 리넨으로 만들어져 순박하다. 튜닉 밑에 바지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로롬은 로마의 토가가 팔리움과 팔라에 의해 점차 착용하지 않아 크기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 비자틴 왕족들의 장식적인 띠로 변화하게 되었다. 무거운 실크에 보석과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을 많이 하여 빳빳하였다.

브라코는 무릎이나 발목까지 오는 바지로 남자들이 짧은 튜니카 밑에 입었다. 바지의 폭이 다리에 붙은 것은 호사,  폭이 넓은 것은 브라코라고 하였다. 브라코는 원래 추운 북유럽 같은 지방의 의복이다. 로마에서 북쪽을 영토를 넓힐 때 군인들이 입기 시작하였다. 귀족들에게는 야만인의 의복이라고 하여 경멸하였기에 호감을 얻지 못하고 노예층이나 서민에서만 애용되었다. 비잔틴에서는 긴 브라코가 널리 착용되어 왕이 입은 모습도 보였다. 옷감은 주로 울을 사용하였다.

파에눌라는 판초형식의 길이가 긴 케이프를 말한다. 로마에서는 서민들이 실용적인 겉옷으로 입었지만 비잔틴에서는 사제복이 되었다. 현대 천주교의 전례복인 채서블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이미지출처 : Choir of San Vitale, Ravenna